필기구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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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가 법의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1989년의 이철규 의문사 사건이었다. 의학부 시절 학생운동을 하며 이 사건을 접한 그는,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을 평생의 소명으로 삼기로 했다. 이후 그는 우연히 이철규 열사의 부검을 맡았던 법의학자와 함께 근무하게 되었고, 사건의 진실과 법의학의 엄중함을 직접 체득하게 되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증여'자로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있다. 산타클로스. 세상은 '시장경제라는 교환의 논리의 한복판에서 증여를 성립시키기 위해' 산타클로스를 발명했다. 그런데 시대와 문화와 동네에 상관없이 어떻게 산타클로스라는 존재는 가능할까.
이는 산타클로스라는 장치가 '이건 부모가 주는 증여야.'라는 메시지를 지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산타클로스 덕분에 아이들은 부모에 대한 부채의식을 떠안을 필요 없이 순수하게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산타클로스는 유효기간이 있다. 산타클로스의 정체가 부모였다는 것을 아이가 알게되는 순간 산타클로스의 역할은 끝이 난다. 우리가 '산타클로스 같은 건 없어.'라는 사실을 안 순간, 더 이상 어린아이일 수 없는 것이다. 저자 지카우치 유타의 설명.
"요컨대, 산타클로스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시간'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시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 책은 "증여의 원리, 언어의 본질을 밝혀낸 비트겐슈타인 철학. 이 두 가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세계의 구조를 알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증여가 키워드인만큼 저자가 생각하는 증여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한다. 이 책에서 증여는 "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김에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그리고 그런 것의 이동을 '증여贈與'"라고 부른다.
증여에 대한 철학적 결론이다. 요약하자면 '증여는 우리 앞에 불합리한 것, 즉 변칙현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아니, 시장경제라는 체제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빈틈' 자체가 바로 증여다. 잠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를 빌어온다. 시장경제라는 체제와 교환의 논리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증여라는 변칙현상이 보이게 된다는 것.
저자가 인용한 아즈마 히로키의 문장이 더 쉬울 수도 있다.
"증여는 오히려 시장 속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증여란 교환의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구입한 것이 다른 곳에 가거나 구입하지 않은 것이 내게 오는 것이 증여의 본질 아닐까요. 일단 교환이 있어야 증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책 제목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보다는, 부제인 <자본주의의 빈틈을 메우는 증여의 철학> 이 부분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
일본에 놀랄 때가 많지만 그 중에 하나가 현실을 분석해내는, 서양의 방법론을 끌어오는, 그리하여 자신들만의 철학을 결론 짓는 태도들이다.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종교관을 이야기하곤 한다. 결국 삶은 세상을 해석하는 철학의 문제인 것이다.
이호 교수는 지금까지 약 4천구 남짓의 시신의 부검을 진행하였다. 그중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사건'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등의 우리 사회를 뒤흔든 굵직한 참사 사건의 희생자들도 포함돼 있다. 그토록 다양하고 많은 참사와 의문사의 시신들을 부검하면서 이 교수는 그들이 침묵 속에서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부단히 힘쓴다.
그는 참사의 '결과'에 대한 처벌과 책임을 묻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왜 이런 일이 발생하였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고 예방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이호 교수의 생각과 달리 예방보다는 뒤늦게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지우는 일에 더 급급한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대형 참사'를 되풀이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중심은 그가 법의학자로서 부검한 수많은 사건들의 기록이다. 특히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참사'는 가난하고 어린 생명들이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이라 저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경우다. 또한 보험금을 위해 병든 아내를 살해한 남편의 사건처럼, 인간의 탐욕과 위선이 얼마나 잔혹한지도 담담히 보여준다. 이런 이야기들은 독자에게 충격을 주기보다, "죽음이 말해주는 삶의 민낯"을 차분히 곱씹게 만든다.
이호 교수의 글은 의학적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되, 어렵지 않고 서술이 간결하다. 그는 해부대 위의 시신에서 단지 '사망 원인'만 찾는 게 아니라, 죽음 뒤에 남겨진 이야기와 의미를 끌어내고자 한다. 책 전반에 흐르는 인문학적 통찰, 금언(名言), 다양한 예화는 독자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삶과 죽음에 more info 대한 철학은 결코 가볍지 않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여러 '죽음' 사례를 통해 궁극적으로 '삶'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숨이 멎을 때, 그리고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이가 세상을 떠날 때." 그렇기에 죽음을 애도하고 그 의미를 기억하는 것은 결국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우리 문화에 대해서도 그는 말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연명치료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평온하게 떠날 수 있는 존엄사 문화가 한국 사회에도 정착되기를 바란다. 이호 교수는 수많은 참사와 의문사 속에서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법의학자이지만 누구보다도 삶에 가까운 이야기꾼이자 성찰자이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은 죽음을 둘러싼 막연한 두려움과 회피를 걷어내고, 그 안에서 진실한 삶의 모습을 마주하게 해주는 깊은 울림의 책이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삶의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될 것이다.